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학 농민 혁명 (문단 편집) === 농민군의 산화 === ||[[파일:external/t1.daumcdn.net/qCGUyzLIUsxd_7gkefm-7lgsWKs.jpg|width=300]]|| 한편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의 핵심이라 할 만한 북접은 이때까지 [[남접]]의 [[전봉준]]을 부정했지만[* 처음에는 남접군 몰아내겠다고 출병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북접은 난이 정치성을 띠는 걸 경계하였으며 특히 대원군과의 결탁을 탐탁치 않아 하였다. 이걸 막은 것은 남접이 생각보다 잘 싸웠기 때문이지, 일본과의 문제가 벌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교도들을 죽을걸 뻔히 아는 상황으로 내모는 것은 교주인 최시형 관점에서 못할짓이었으며 그렇기에 무장봉기를 일으킨 남접을 곱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남접이 생각 이상으로 잘 싸웠기에 호응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만약 남접이 패배했더라면 자신은 물론이고 동학교도 전체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협력을 선언하고 손병희를 지휘관으로 삼아 남접에 합세하였다. 이렇게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지방의 남접군[* 남접의 주요 인물은 전봉준이 아니라 충청도의 서장옥이라는 사람이었으나 이 시점에서 서장옥은 그저 전봉준의 부관 수준이 되어버렸다.]과 [[손병희]] 등이 이끄는 경기 남부, 충청 지방의 북접군이 [[논산]]에서 만나 '''10만~20만''' 동학 농민군이 결집되었고, 이들은 한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의 관군과 [[일본군]]이 연합하여 농민군을 진압할 준비를 한다. 여러 매체에서 묘사하는 것과 달리 2차 동학 농민 혁명 당시에도 1차와 마찬가지로 '''진압군의 주력은 조선 관군이었다'''. [[우금치 전투]] 당시 진압군 주력은 조선군 순무영(巡撫營)[* 반란이나 국경에 소란이 생기면 편성되는 임시 군영.] 및 친군 경리청(親軍經理廳) 2개 대대(약 1,000명)와 일본군에게 훈련받고 일본군 지휘계통 아래 있던 최정예 교도중대(350여명)였다. 일본군은 제 19 후비(예비역)보병대대 2중대(200여명)이 전부였다. 더군다나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에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던 개틀링 건과 크루프제 야포들은 모두 조선 관군 장비였다. 이 당시 조선군은 보급난에 시달렸는데, 정사와 야사 모두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할 당시 조선군이 자신들의 군수 물자와 생산 시설을 죄다 파기해버렸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력 소총인 마우저와 레밍턴의 탄약은 물론 주요 지원 화기인 [[개틀링 기관총|개틀링포]]와 크루프 야포들의 포탄도 제대로 보급이 안 돼 일선에서는 탄약을 줄기차게 요구하였고, 1선에서 물러난 암스트롱 야포까지 끌고 올 정도였다.[* 이유는 조선으로 파병온 일본군이 서울을 장악하기에는 매우 소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장악 가능했던 것도 운이 매우 크게 작용했는데, 경군이 남방으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러 내려간 상태라 남은 전력으로는 궁궐 수비도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얼마 안 남은 병력들을 이리저리 재규합하고 왕실도 더 넓어서 방어는 힘들지만 지원 병력을 부르기 쉬운 창덕궁으로 이어했지만, 병력 수가 너무 적다보니 방어를 하기가 힘들었다. 여기에 더 문제였던 것은 오-대-기-초-사-부-영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조선의 군 체제로는 서양식 군제를 도입한 일본군에겐 기동력과 반응 속도에서 현저한 열세였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조선군 체제에서 장수들은 병조 공문 없이는 병졸 한 명도 부릴 수 없었는데 이것이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그래서 [[경복궁]]은 함락되고 남은 병력은 도망치면서 남은 군수 물자와 생산 시설을 일본군이 사용할 수 없도록 스스로 파기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1차 동학난 때 동학군을 전주성에 몰아넣고 크루프 야포와 마우저 소총을 운용하는 정예 병력들을 통해 전주성을 탈환했던 조선군은 2차 때에 이르면 일본군이 주는 물자에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문에 물자 보급이 제대로 되질 않아 이 당시 조선군의 보급은 일본군이 해주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일본군이 사실상 조선군에 통제권을 행사하는 실정이었다. 이후 [[공주시|공주]]에서 벌어진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동학군이 박살나고,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 전투에서 [[전봉준]]의 주력 부대가 패배하면서 이후 동학군은 각개격파를 당하고 사실상 와해된다. 농민군은 치열하게 싸웠으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관군은 미제 [[레밍턴 롤링블럭|레밍턴 소총]]과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하였으며, 일본군 역시 스나이더 소총 혹은 자국제 [[무라타 소총]]으로 무장하였었다.] 더군다나 당시 청군을 제외하고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식 군사 교육을 받은 일본군의 전술 능력이 농민 출신 동학군 지도부보다 월등히 높았기에 전략 전술 측면에서도 동학군은 관군과 일본군보다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후 주요 인물 중 하나였던 [[김개남]]은 그의 매부 서영기의 집에 숨어있다가 잡힌 후 전주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바로 참수되었는데, 이는 전라 [[관찰사|감사]] 이도재의 독단으로 당시 법률로는 불법이었다. [* 전근대 법률로 따져도 사형 권한이 국왕에게만 있기에 함부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중대한 왕권 침해였으며 더군다나 당시에는 [[갑오개혁]] 이후 참형이 폐지된 상태였다. 나중에 [[전봉준]] 등이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음에도 교형 판결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황현은 김개남을 처형한 후 원한이 있던 자들이 그의 [[내장]]을 씹어먹고 [[인육]]을 제삿상에 올렸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도재의 독단적인 판단 때문에 조선 정부와 일본의 마찰이 생겼다. 일본 측에서는 공사를 파견하여 이도재의 독단 행위를 조사하고 처벌을 같이 상의하자고 하였으나 조선 정부가 그를 감싸면서 이도재는 결국 감봉 3개월의 가벼운 처벌만 받을 수 있었다. 금구로 도피한 [[전봉준]]은 다시 동학군을 재건하려 했으나 1894년 11월 내부 배신자의 밀고로 순창에서 관군에 체포당했고 다른 주모자인 손화중, 최경선, 서장옥 등도 역시 체포되었다. 재판 공초를 보면 배후, 특히 [[흥선대원군|대원군]]과의 관계를 캐묻는 심문관과 이에 대해 자신이 주모하였음을 주장하는 전봉준의 모습이 나타난다.[* 동학군의 목적은 이견이 많다. 가장 흔한 학설은 대원군과 연계되어서 대원군 복위와 국왕 교체(고종의 큰 형의 아들인 [[영선군|이준용]]을 등극하고 고종을 상왕 옹립)를 노렸다는 것이고 고종과 직접 연결되었다는 설도 있을 정도. 이후에 등장한 주장이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했다는 것. 이 시기는 일본군의 경복궁 침공으로 고종이 일본군의 손에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재봉기 시 고종의 안위가 위태롭다는 이유로 봉기가 미뤄졌는데,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해서 전봉군에게 궐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대원군의 목적은 당연히 자신의 재집권. 그 과정에서 이재면 즉위도 실제로 대원군이 수 차례 시행한 일이므로 자연스럽게 확률이 높아진다. 전봉준 - 대원군 - 고종을 묶는 가장 설득력 높은 주장이긴 한데, 그런데 이렇게 되면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대원군이 단순히 자신의 집권을 위해서 고종과 동학을 모두 이용한 혐의가 된다.] 일본군은 전봉준을 포섭하기 위해 최대한 그를 살려보려 하였으나 전봉준은 그럴 마음 따윈 없어서 결국 교수형에 처해진다.[* 손화중을 포함한 김덕명, 최경선, 성두환 등 체포된 농민군의 주요 인사도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다.] 봉기가 시작된지 1년 2개월 만인 1895년 음력 3월의 일이었다. '''그렇게 1894년 ~ 1895년, 1년 만에 모든 사건은 종료되었다'''. 2차 봉기는 전국적인 봉기였기에 [[황해도]] 동학도도 봉기하였다. 여기서는 해주성을 공략해보았으나 실패하였는데, 이 동학군의 지도자가 바로 김창수([[김구]])다. 그리고 이때 황해도에서 민병대를 조직하여 동학군을 토벌한 유력자가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인데, 안태훈은 김창수가 아까운 인물이라 생각하여 도움을 주고 이후 김구와 안태훈은 친분을 맺게 된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안태훈이 먼저 김구 측에 접근하여 서로 싸우지 말 것을 청하고 이후 동학이 몰락하자 김구를 식객으로 받아들여 잘 대우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